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방화를 했다」 「폭동을 일으켰다」등의 유언비어가 떠돌고 많은 조선인·중국인·일본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과거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관동대지진의 「기억」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1995년에 일어난 한신·아와지(阪神·淡路) 대지진 때에도, 관동대지진을 떠올리며, 외국인에 대한 학대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阪神•淡路10년』2004년, ).그 우려는, 특히 희생자 측이었던 재일 동포들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5년 후의 2000년 4월 9일 이시하라(石原) 도쿄 도지사가 「불법 입국한 많은 삼국인(조선·대만 등 일본의 구식민지 사람들을 가리키는 차별적인 호칭), 외국인이 도쿄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큰 재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소요사건(騒擾事件)까지도 가정할 수 있다」라고 연설하여 문제가 됐습니다.
이러한 이시하라의 발언과 같이 외국인이 「위험」하다는 이미지는 관동대지진의 때에도 유포되었습니다
관동대지진 속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학생 등이 일본인 민중과 군대·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왕티시엔(王希天)등 정치·노동운동가들도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교과서 등 많은 기술에서는 「지진 후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퍼지고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관동대지진 때에만 일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지진 자체가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는 유언비어 확대와 학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계엄령 아래에서 유언비어를「사실」이라고 퍼트리고 군대가 학살을 주도한 것이 유언비어의「신빙성」을 높여주었습니다.
또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4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 운동과 그 후에 고양된 민족운동이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는 「불령」의 무리라는 이미지를 일본 국가와 민중에게 심어주게 되었고 이 또한 학살의 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걸까요? 연구자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배외적인 언동이 높아진 것을 그 배경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갑오농민전쟁 이후의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을 군사력으로 탄압해 왔습니다. 특히 정부는 3・1 민족독립운동과 그 후의 민족운동・노동운동을 적대시하며 조선인을 「불령선인」이라고 경계했습니다. 또한 조선인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의식이 일본 민중 속에서도 강해져갔습니다.
이러한 배경과 의식을 가진 정부가 앞장서서 「불령선인」이 있다고 하는 유언비어를 흘리며 지역의 민중에게도 경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신문도 사실무근의 기사를 써서 유언비어를 확대 시켰습니다. 군대와 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하고 민중도 함께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마치 전쟁이라도 하는듯한 분위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인에 대한 배외적인 의식을 배경으로 관민 일체의 학살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조선인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학살을 주도함으로 인해 각 지역에서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조선인 학살은 관동대지진의 피해지역과 그 주변에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인 학살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인이 방화했다」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지진 당일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에 퍼졌습니다. 민중뿐 아니라 지역의 경찰도 유언비어를 퍼트렸습니다.
유언비어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무성(경찰이나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관청)이었습니다. 내무성이 치안 확보를 위해 2일 계엄령을 시행하는 동시에, 사이타마현청(埼玉県庁)을 통해, 각 읍과 촌에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으니 민중에게 경계할 것을 명령하고 「적절한 방책」을 취하도록 지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 지바현(千葉県) 후나바시(船橋)의 해군 무선송신소에 전령을 보내 조선인의 「불령」한 움직임이 있어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엄중하게 단속하라는 전령을 전국에 타전시켰습니다.(3일 아침 발신). 이것만 보아도 유언비어 유포의 정부 관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레 진수부 부관 앞 전보
9월3일 오전8시15분 요해(了解―확실하게 전달받았음)
각 지방장관 앞 내무성 경보국장 보냄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를 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 석유를 붓고 방화하는 자들이 있음. 이미 도쿄후카(東京府下)에는 일부 계엄령이 시행되고 있으니 각지에서는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더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단속을 더할 것.
다이쇼12년(1923년) 9월2일
군읍면장앞 사이타마현(埼玉縣) 내무부장
불령선인 폭동에 관한 건
이첩
이번 재해에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었고 또한 과격 사상을 가진 무리들이 몰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함…. 이러한 위험이 있으니 읍면 당국자들은 재향군인회와 소방대 청년단원 등과 일치협력하여 경계에 임하고 유사시에는 신속하고 적절한 방책을 강구할 것, 이를 빨리 대처할 것,….
위에 게재한 2개의 표는, 당시 정부와 군이 군대의 학살에 관하여 조사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작성한 것입니다.
단,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이 표 외에도, 아라카와(荒川) 하천 부지를 비롯해 각지에서 군대에 의한 학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나라시노(習志野) 기병연대의 병사였던 작가 엣츄야리이치(越中谷利一)는, 실탄을 가진 임전태세로 출동, 「장교는 검을 꺼내들고 열차 안팎을 돌며 조사했다. ‥‥조선인은 모두 질질 끌려 내려왔다. 그리고 즉시 총검 아래로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일본 피난민들 안에서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만세 환호 소리-조국의 적!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 」(엣츄야리이치(越中谷利一) 「관동대지진의 기억」『엣츄야리이치 저작집』1971년)라고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표와 같은 사실이 일본 정부에 의해 공표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정부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직간접적으로 학살 사건의 관여를 계속 숨기기만 했습니다.
도쿄도(東京都) 스미다구(墨田区)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남아있습니다.「아라카와역 (현 야히로(八廣))역의 남쪽 제방으로 끌고 온 조선인을 강 쪽에 세워놓고, 군인들이 기관총으로 쏘았습니다. 총에 맞은 사람들은 바깥쪽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굴러떨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몇 명이나 죽였을까요. 꽤 많이 죽였지 말입니다. 저에게는 구멍을 파라고 시켰습니다. 나중에 석유를 뿌리고 태워서 묻어버렸습니다」.(지역 주민의 증언) 이 장소는 구 요쓰기(四ツ
木) 다리 옆이었습니다. 이 근처에서는 9월 1일 밤부터 민중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고 하는 증언도 남아있습니다.
요코하마 사건에 관련해서는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카무라바시(中村橋)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구타를 당한 조선인이 강 속에 던져졌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어 양쪽 기슭에서부터 한 사람씩 조선인의 머리를 갈고리로 내리쳤고 그 조선인은 결국 죽었다. (미나미요시다(南吉田) 제2심상고등소학교 학생의 작문).」라는 내용의 초등학생 증언이 남아있는 정도입니다.
나중에 이성칠 이라는 사람이 유골을 모아서 재를 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호쇼지(宝生寺)라는 절에서 받아주었습니다. 현재도 희생자를 위한 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이타마(埼玉)·군마(群馬)에서는 내무성의 지시와 신문의 유언비어 보도 속에서 각 읍촌에 자경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자경단은, 경찰이 조선인을 보낸 군마현(群馬縣) 방면의 나카센도(中山道-길가) 와, 조선인이 수용된 경찰서에서 조선인을 습격했습니다. 사이타마현(埼玉縣)의 오미야(大宮), 요리이(寄居), 고다마(児玉), 구마가야(熊谷), 혼조(本庄), 진보하라(神保原), 군마현의 후지오카(藤岡), 구라가노(倉賀野) 등에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인 희생자 수는 사이타마현에서 200여명, 군마현에서는 20명 가까이 조사되었습니다.
지바현(千葉縣) 후나바시(船橋)의 해군 무선송신소에서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갔고 송신소의 소장은 이웃 주민에게 무기를 주며 조선인을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후나바시에서는 철도공사에 종사하고 있었던 조선인이 자경단에 넘겨져 학살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지바현에서는 우라야스(浦安)·미나미교토쿠(南行德)·마바시(馬橋)·아비코(我孫子)등에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경단에 의한 사건은 계엄사령부가 조선인 학살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9월 6일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조선인과 중국인이 수용되었던 나라시노(習志野)의 수용소에서 헌병이 조선인을 추려내어「사상이 이상한」사람을 죽이고, 이웃 마을에도 조선인을 넘겨주어 주민들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증언과 마을 주민의 일기 그리고 1998년에 발굴된 유골들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군대나 경찰은 「불령」스러운 행동을 하는 조선인 집단을 당연히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조선인을 박해하는 움직임은 커져나갔습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뿌린 씨앗인 학살을 진압시키기 위해, 「임시지진재해구호사무국경비부」를 시켜서 9월 4일 자경단의 무기 소지와 검문을 금지시켰습니다. 5일에는 내각 고지 제2호에 조선인에 대한 박해금지와 신문 보도의 유언비어를 금지시켰습니다. 같은 날, 정부의 치안 담당자가 모여, 외부 학살 사건에 대해 관헌이 취해야 할 태도를 협의하고, 유언비어를 사실로 인정하자는 방침이 결정되었습니다. 국가가 퍼뜨린 정보가 틀렸을 경우 조선인 학살에 대해 국내외에서 문제가 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조선인 학살 관여는 은폐되었습니다. 10월 20일 사법기관은, 민중에 의한 학살 사건 보도 해제에 맞춰서 조선인이 저지른 「사건」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대부분은 조선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유언비어의 내용처럼 조선인 집단 범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왼쪽 사진은 가메이도(亀戸)사건의 유골 발굴 현장을 보도한 신문 기사입니다. 이곳에서 경관은 학살당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유골을 유족보다 먼저 파내고, 유족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희생자 유족에게 유골을 보내고,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유골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판명하지 못하도록 처치할 것」이라고 적은 조선 총독부의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1923년 12월 14일, 제국의회에서 무소속의 다부치 도요키치(田淵豊吉)는 다음과 같이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저는 내각의 여러분들이 인도상 가장 슬퍼해야 할 대사건에 대해 신성한 의회에서 일언반구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단한 분개와 슬픔을 느낍니다. ‥‥천명 이상의 사람이 죽임을 당한 대사건을 불문에 부쳐도 되는 것인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나쁜 일을 했을 경우에는 사죄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헌정회의 나가이 류타로(永井柳太郎)도 정부의 책임을 추궁했고, 이에 대해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총리대신은 「정부는 일어난 사항에 대해 목하 조사 진행 중」이라고 답변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방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임시지진재해구호사무국경비부」사법 위원회는 9월 11일, 조선인 학살에 가담한 자들 전원을 체포하지 말 것, 그러나 경찰에 반항한 자의 검거는 엄정하게 진행할 것, 등의 방침을 정했습니다. 9월 17일 이후, 살인죄를 범한 민중의 검거가 시작되었지만 상기와 같은 방침 하에 검거와 재판은 대단히 불성실하게 끝났습니다. 또, 군대에 의한 조선인 학살은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조선인을 살해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라고 진술한 피고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국가가 인정한「독립의 음모를 꾀하는 무서운 조선인」을 죽였다고 하는, 마치 조선인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한 의식이 느껴집니다.
판결도, 일본인 살해의 사례나 경찰서를 습격한 사례에 비교하면 조선인 학살은 가벼웠습니다. 그런데도 피고들은, 자경단에만 사건의 책임을 지우는 정부를 비난하며 죄의 경감을 요구했습니다.
이렇게 검거나 재판은 민중의 불만을 배려하는 형태로 이뤄졌고 피해자인 조선인의 인권은 무시되었습니다. 민족 차별은 재판에서도 관철되었습니다.
지진 후, 조선인 청년들은 재해 조선인을 「위문」한다는 명목하에 학살 조사를 진행하여, 희생자 6000여 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남겼습니다. 추정을 동반한 조사에 의한 것으로 희생자 수가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연구에도 수를 엄밀하게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체를 숨기거나 하는 등의 조사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사의 불확실성 만을 따질게 아니라 왜 희생자 수가 불분명한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인의 무덤이나 추도 비석이 각지에 세워졌지만, 조선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들의 유족도 거의 불분명합니다.
위의 주장을 제기한 문무선(文戊仙)씨는 아버지의 친구가 학살되어 그 학살된 동포의 시체를 목격, 깊게 상처받은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일본 변호사 연합회(日弁連)가 조사하여 2003년에 일본 정부에 권고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수상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해방 후, 재일 동포와 일본인의 손에 의해 각지에서 추도 행사가 열렸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자료의 발굴이나 방문조사 등도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희생자의 이름조차 거의 알지 못 합니다. 희생자에 대해 모르는 것은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조선인을 학살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추궁 받는 것이 두려워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입니다. 민중도 이에 가담했습니다. 아직도 「조선인 학살은 허상이다」라거나 「조선인 폭동은 사실로 학살은 정당방위다」등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입니다.
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은 아직도 미해결로서, 학살의 배경인 차별과 혐오, 박해 등 재일 외국인에 대한 배외적인 언동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해결로 남아있는 이상, 국가는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여 유족에게 사죄하고, 사건의 참된 해결을 위한 대책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또, 이러한 대책을 나라에 요구하는 운동이, 배외주의를 용서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자식 셋과 부인을 남겨두고―도쿄에 거주하는 할머니
관동대지진은 제가 태어나기 1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오빠인 박덕수도 희생되었습니다. 외백부는 군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진 후 도쿄로 향했습니다. 같은 고향(同郷)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33살이었던 외백부는 「일본어도 지리도 잘 안다」라며 나간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고향에는 어린 딸과 아들, 그리고 28살의 부인이 남아있었습니다. 외백부는 어머니보다 10살 위로 16살에 시집 간 어머니를 굉장히 아끼셨습니다. 어머니도 오빠를 많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병상에 누우셨고 모유도 멈췄다고 합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요. 저도 매년 9월 전후가 되면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남겨진 저의 사촌형제들은 고향의 어머니 무덤 옆에 유골이 없는 채로 아버지-박덕수의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저의 재일 동포 4세인 손주들도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끔찍한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할머니에 의한 인권 구제 신청서(1999年12月10日)
①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은 「집단학살」이며, 중대한 인권침해인 것을 밝혀라.
②조선인 학살은, 외국인 학살이기 때문에, 국제법에 의해 외국인(타민족)에 대한 집단학살 행위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을 밝혀라.
③집단학살의 가해 책임자를 일본의 국내법에 의해 처벌하지 않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밝혀라.
④일본 정부는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라. 재일 조선인, 재일 외국인에 대한 집단학살의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해라.
일본 변호사 연합회는 이 호소에 기초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이하를 나라에 권고 (2003년 8월 25일)
1.나라는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학살 사건에 관해서, 군대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유족 및 허위사실의 전달 등 나라의 행위로 유발된 자경단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유족에 대하여 그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2.나라는 조선인, 중국인 학살의 전모와 진상을 조사하고,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