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이하「묻는 모임」)은 학살된 희생자를 애도하고, 진상규명을 해 온 지역의 시민과 연구자에 의해 2010년9월에 발족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의 유포와 학살에 주체적으로 관여한 것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죄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를 할 것, 그리고 자료의 항구적인 공개와 보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묻는 모임」임원 ( 공동대표)
이시바시 마사오(石橋正夫-일조〔日朝〕협회 회장)
강덕상(姜徳相-시가현립대학〔滋賀縣立大學〕명예교수,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릿쿄대학〔立敎大學〕 명예교수)
요시카와 키요시(吉川清-지바현〔千葉縣〕에서의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 위원회 대표)
1923년9월1일, 관동(關東)지역을 매그니튜드 7.9의 대지진이 습격했습니다 (관동 대지진). 이때, 조선인과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인 희생자는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나왔습니다.
유언을 퍼뜨린 것은 국가와 민중이었습니다. 또한, 국가와 민중 쌍방이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특히 국가는 지방행정 기관이나 무전을 사용하는 등,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군대에 의한 다수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유족에 대한 사죄도 진상을 밝히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조선인 희생자의 수도 희생자의 이름도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중국인·일본인 학살에 대해 재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 연구자, 그리고 지역의 시민들이 추도와 조사를 직접 진행해 왔습니다.
한편, 일본 정부는 학살에 이르는 직접・간접의 관여를 계속 숨겨왔습니다. 아직도 희생자의 이름도 인원수도 대부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희생자의 조사는 당시의 일본 정부가 책임지고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조사를 하기는커녕 사체의 훼손을 비롯한 은폐 공작을 하고, 사건 직후의 조선인에 의한 조사와 추도를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인 학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변호사 연합회가 조사를 했습니다. 동회는 지진 재해로부터 80주년이 되는 2003년에 『관동대지진 인권구제신청 사건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고이즈미 수상에게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죄하며, 진상 조사를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것을 무시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바꾸고자 지금까지 각지에서 추도·조사에 종사해 온 시민이 연대하여 지역을 넘어 큰 틀 안에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기운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10년「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이하「묻는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2010년1월23일에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의 운동을 생각하는 모임」을 개최하여 설립 준비를 진행할 것을 결정하고 이후 4월24일, 5월27일, 7월19일에 준비 모임을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9월24일 「묻는 모임」의 설립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과 회칙이 승인되어 정식으로 묻는 모임이 발족되었습니다.